Poem 676

새해 / 구상

새해 / 구상 시인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이중섭

Poem 2021.01.03

별하나 /김용택

별하나 /김용택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든 내게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힘내시어요 나는 힘 없지만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 드려요그러면서 그러시면서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가끔 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Poem 2020.12.27

겨울 - 조병화

겨울 - 조 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Poem 2020.12.20

12월 - 오세영

12월 - 오 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Poem 2020.12.06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Poem 2020.11.29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ㅡ 정유찬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ㅡ 정유찬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Poem 2020.11.23

가을날 ----- 릴케

가을날        ----- 릴케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들판에 바람을 풀어주옵소서.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마지막 단맛이 무거워져가는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에 없는 자는 집을 짓지 못합니다.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토록 그렇게 살 것이며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바람에 나뭇잎이 그를 때면 불안스러이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혜맬 것입니다.

Poem 2020.11.23

11월의 詩 / 청원 이명희

11월의 詩 / 청원 이명희 가슴 두근거리는 일 접고 이별의 때를 알아 스스로 길 떠나는 모습 저토록 아름다운 것일까 햇살을 품으면 가슴 뛰었고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고 싶어 가슴에 환한 꽃물 들었던 날들이 땅으로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나는 것일까 부질없는 욕심 밀어내고 속 깊은 지병(持病) 정성껏 익힌 잎 새에서 향기가 난다 비련의 멜로디 그늘진 산을 넘은 고독의 단추를 채운다 진실을 거부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제 순백의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Poem 20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