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까닭 / 정호승

차 지운 2016. 6. 23. 11:29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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