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바람 부는 날 / 천양희

차 지운 2016. 10. 17. 11:45


    바람 부는 날 / 천양희

    바람 부는 날입니다.
    숲그늘이 어룽대면서 계곡이 웅성거립니다.
    바위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물길을 배웅합니다.
    절벽들이 오래 산허리를 꺾고 나뭇잎들의 속이 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것들의 하루가 길어집니다.
    이젠 잡목숲에 머무르는 것이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산길을 쓸며 지나갑니다.
    한때의 낙엽들 썩었던 거, 땅 끝 어디로 쓸렸는지 발 한쪽을 헛디딥니다.
    언덕이 따라가는 산정은 높았으나 산자락 끌고 내려가는 물은 평등합니다.
    지금까지 우릴 지켜낸 건 마음끼리 튼 길 이었습니다.
    슬픔도 친숙해지면 불행 속에서도 기뻐하는 자 있을 것입니다.
    능선을 타고 골수까지 찌르르 내려오는 찌르레기 소리 골짜기만큼
    깊어어집니다.
    제 깊은 속에 다 칭얼대는 새끼들을 품은 까닭입니다.
    골이 너무 깊어 숨는 벌레들은 땅껍질을 뚫는 유지매미들을 모를 것입니다.
    나는 둥근 새장 하나 등처럼 내다 걸고 기다립니다.
    제 모양이 둥글어지길 기다리는 것이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랑일 것입니다.
    바람부는 날입니다.
    웅웅거리는 삶의 송전탑 위로 하늘이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마을로 내려갈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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