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 천양희 바람 부는 날입니다. 숲그늘이 어룽대면서 계곡이 웅성거립니다. 바위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물길을 배웅합니다. 절벽들이 오래 산허리를 꺾고 나뭇잎들의 속이 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것들의 하루가 길어집니다. 이젠 잡목숲에 머무르는 것이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산길을 쓸며 지나갑니다. 한때의 낙엽들 썩었던 거, 땅 끝 어디로 쓸렸는지 발 한쪽을 헛디딥니다. 언덕이 따라가는 산정은 높았으나 산자락 끌고 내려가는 물은 평등합니다. 지금까지 우릴 지켜낸 건 마음끼리 튼 길 이었습니다. 슬픔도 친숙해지면 불행 속에서도 기뻐하는 자 있을 것입니다. 능선을 타고 골수까지 찌르르 내려오는 찌르레기 소리 골짜기만큼 깊어어집니다. 제 깊은 속에 다 칭얼대는 새끼들을 품은 까닭입니다. 골이 너무 깊어 숨는 벌레들은 땅껍질을 뚫는 유지매미들을 모를 것입니다. 나는 둥근 새장 하나 등처럼 내다 걸고 기다립니다. 제 모양이 둥글어지길 기다리는 것이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랑일 것입니다. 바람부는 날입니다. 웅웅거리는 삶의 송전탑 위로 하늘이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마을로 내려갈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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