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Paganini - Violin Concerto No.4

차 지운 2016. 3. 22. 13:29



전악장 감상
(Paganini Violin Concerto No.4)
1828년 3월 파가니니는 유럽 연주 여행을 비엔나에서 시작하였다. 그곳 시민 들은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1, 2, 3 번" 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레퍼터리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고 1829년 가을에는 새로운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0월 16일 파가니니가 라이프찌히에서 친구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1악장과 아다지오 악장은
완성되었으나, 가혹하리만큼 바쁜 연주 스케줄로 인하여 론도 악장은 제때에 끝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1830년 2월에는 독일의 프랑크프르트에서 새로운 협주곡이 완성되었으며
이 작품을 프랑스 파리에서 꽃 피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같은 친구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830년을 독일에 머물렀던 그는 수차례 연주하였으며 1831년 3월에 가졌던 파리의
초연에서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가니니는 초년병 시절 (1796 - 7년)에 파리에서 활약하던 루돌프 크로이쳐(베토벤 바일올린 소나타)
를 헌정 받았으며 당시에 파리에서 바이올린 비루투오서로 이름을 날리던 Viotti 에게 많은 훈련을 받은
비오티 派의 선두주자)를 알게 되면서 파리 사람들이 좋아 하는 바이올린 연주방식을
터득하게 되어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비오티와 크로이쳐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Nicolò Paganini (1782 - 1840)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