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법정 그리고 정채봉
20년 전 봄볕이 무척이나 따뜻했던 5월, 피천득 선생님과 정채봉 편집부장을
모시고 법정 스님이 계신 송광사 불일암에 갔었습니다.
피 선생님의 팔순을 기념하는 봄나들이 소풍이었지요. 그때 스님은 회색 소형차
를 직접 몰며 우리를 광양 매화마을, 낙양읍성을 거쳐 여수까지 이곳저곳 꽃구경
을 시켜주셨습니다.
자연스레 차 안에서 네 사람은 이야기꽃도 피우게 됐지요.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스님, 스님은 최근에 어느 때가 가장 힘드셨어요?”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러 화장실에 갈 때입니다.
옆에서 볼일 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할 때가 제일 난감하지요.”
생각보다 급하게 차를 모는 스님께 “스님도 과속 위반 딱지 많이 받아보셨지요?”
하고 여쭙자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던 스님의 옆모습은 열 살 소년이었습니다.
20여 분 대나무 오솔길을 살살 올라 암자에 도착한 피 선생님은 먼지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갈한 해우소와 스님 거처를 둘러보시고 나무 의자에 앉으셨습
니다.
그리고 물끄러미 앞산인 조계산을 바라보다 특유의 그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스님! 스님은 무소유라 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셨네.”
이때도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요.
단지 살짝 미소만 지으시던 모습이 영영 그리움으로 남을 줄 몰랐습니다.
피천득, 법정 그리고 정채봉….
이분들은 이제 제 전화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젠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함께 웃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그분들의 목소리는 생생히 기억납니다.언제라도 듣고 싶으면
제 귓속의 녹음기는 그분들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아주 거창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저 짧은 몇 마디 정도만….
“한 세상 즐겁게 살다 가는 거지!”
발행인 김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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