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 시기에 태어난 검출한 스님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원광법사가 중국 호구사에서 불법을 공부하던 때이다. 호구사 승려가 원광법사를 찾았다.
"원광스님! 한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서요."
"아니, 호구사 대사께서 어찌 이 빈도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시는지요?"
"당신이나 나 말이오, 이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게요,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게요?"
원광스님이 웃으면서 "허허허, 그야 뒤에서 보면 살아가고 있을 것이요, 앞에서 보자면 죽어오고 있을 것입니다."
"어찌해서 그렇단 말이시오?"
"태어난 것은 이미 지난 일이니 뒷모습이요, 죽는 일은 닥쳐올 것이니 앞으로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구사 스님은 원광스님의 말을 다시 되받으며 "태어난 것은 지난 일이요, 죽는 것은 닥쳐올 일이다. 태어난 쪽에서 바라보자면 살아가는 것이지만, 죽음 쪽에서 바라보자면 점점 한 걸음씩 죽어오고 있는 셈,,,,,." "그러니 살아가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그런 말이지요?"
"생불생 사불사요, 생즉사 사즉생이라 했으니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게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며 생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생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미디어 프레이어(media Player)가 재생 시 시작에서 보면 종료를 향해 가고 있고 종료에서 보면 가는 만큼 오고 있는 표시점처럼 삶과 죽음의 동일선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가고 옴"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 생을 다 하면 누구에게나 죽음이 온다. 가고 옴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이렇듯 생과 사가 본래 둘이 아닐 진데 어찌 따로 두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자신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이어간다는 착각 속에 삶과 죽음을 따로 두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오직 나만의 욕구를 채워가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던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다. 살아가는 삶만큼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도 또한 소중함을 잠시나마 생각해 볼 일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죽음 또한 어떻게 맞이 할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워 갔으면 한다.
"죽음도 살아가고 있는 것과 함께 생을 다 마쳤을 때까지는 동일선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무게가 되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