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가 유달리 칭찬했다고 알려진 이탈리아인은 알비노니었다. 아마도 비발디와 알비노니와 같은 베네치아 거장들로부터 협주곡을 구성하는 원동력을 배웠으리라 생각되어진다. 협주곡의 구성은 대단히 단순하다. 주요 주제는 몇 번이나 나타나지만, 모두가 언제나 완전한 형태로 재현되진 않는다. 주제는 먼저 으뜸 조로 나타나며, 다시 그 근친 조로 나타난다. 그 사이에는 독주자 또는 독주악기군을 위한 에피소드가 숱하게 흩어져 있다. 이를테면 제 2번 BWV1047의 제 1악장은 독주악기에 트럼펫, 리코더(현대 악기로 보면 플롯), 바이올린, 오보에라는 독특한 독주악기군을 갖추고 있다. 선율과 반주에 의한 2중 주제는 상당히 다채롭고, 그에 따라 4개의 독주 악기들은 제각기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로 인하여 독주군은 무한하리만큼 다채로운 구조를 갖추고, 구조와 주제를 전개하여 현악의 오케스트라와 결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동시에 빈 고전파의 수법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서두의 악절에서 하나의 동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갖가지 조성을 가지고 제1바이올린, 제 2바이올린, 비올라와 유니즌으로 나타나게 된다. 제 5번 BWV 1050에 의해 바하는 실질적으로 바이올린과 플롯이 들어가는 쳄발로 협주곡을 안출해내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방백의 궁전>
쾨텐 시대
(1717~1723) 바하의 쾨텐 시대는 그가 최후의 임지 라이프찌히로 떠나기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이 곳 영주 레오폴트 후작은 특히 바하와 음악을 사랑했고, 궁정에는 18명의 뛰어난 악단이 있었다. 바하의 대단히 많은 중요한 기악 작품이 쾨텐 시대의 소산인데, 또 하나의 사건은 1720년에 아내 바르바라가 죽고, 이듬해 말에 15살 아래인 안니 막달레나와 재혼한 일이다. 이 후처는 13명의 자식을 낳았다. 사진은 쾨텐의 궁전.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쾨텐 시대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인데, 실제로는 쾨텐에서 연주하고 있던 것을 방백(方伯)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어 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19세기 중엽까지 출판되지 않았으나, 바하의 자필악보는 키른베르거의 손을 거쳐 베를린 국립도서관으로 넘어갔다. 아울러 많은 필사악보가 18세기 후반에 나왔고,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55년의 날짜가 적힌 제 3번 BWV 1048의 모음악보다.합주협주곡의 거대한 영역 안에서 이들 6곡과 어깨를 겨룰 작품은 헨델의 OP6밖에 없다. 바하의 독주협주곡은 바이올린 독주용에 2곡, 그리고 2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1곡으로 통틀어 3곡뿐이다. 이들 모두가 각기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데, 실로 고고한 존재라 하겠다.
바하는 2개의 선율악기와 통주저음을 위한 트리오 소나타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나(바로크 시대에는 상당히 보편적으로 쓰이는 스타일이었다. 고전의 현악 4중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두 사람의 연주가를 위한 트리오'라고 해야 할 장르에 들어간다. 이들 트리오 소나타 가운데 몇 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트리오 소나타 가운데 똑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소나타, 특히 바이올린이 들어가는 소타나는 연주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 몇 작품은 실내악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고전파 시대의 현악 4중주곡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독주음악은 바하 사대를 훨씬 앞질러 이미 작곡되고 있었다. 바하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6은 쾨텐 시대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BWV1007-12와 마찬가지로 바하 자신이 이들 바이올린 작품을 연주했을 터이지만, 궁정악단의 탁월한 연주자들을 위해 쓰여진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어느 작품이든 2개의 악기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바하 이외의 어느 작곡가도 쓸 수 없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놀랄만한 절약과 암시의 모범이라고 할 이들 작품은 제대로 이해를 얻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 작품들은 일종의 교본으로서의 구실을 해 왔다. 그러다가 멘델스존과 슈만과 같은 위대한 거장들마저도 이들을 완성하여 연주에 적합하도록 피아노 반주를 붙이기도 했다.
이처럼 무익한 행위는 바이올린 작품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첼로의 모음곡에 이르면, 카잘스가 20세기초에 재발견할 때까지 거의 잊혀진 채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