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직설(金口直說)
부처님 말씀은 금구직설(金口直說)입니다.
금구직설이란 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
다시 변동할 수 없는 결정적인 말씀이란 그런 뜻입니다.
세속적인 논리 전개라든가 이론 같은 것은
그때그때 변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 말씀 또는 성자님 말씀은 변동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성자는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가령 무아(無我)라,
무아는 여러분들 잘 아시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아니겠습니까.
불자님들이 그때그때 무아를 극복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무아가 되어야 불법(佛法)인 것이고
무아가 못되면 불법이 못됩니다.
내 존재란 것이
지금 내 몸뚱이 이대로 존재하고
내 생각은 나대로 생각이 있고,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왜 이것이 무아가 될 것인가,
이렇게 의단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나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 보고서 착각하고서 나라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합니다.
모든 인연(因緣)이 화합되어서
잠시간 나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어제나 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하는 아(我)를 집착하면 그때는 아집(我執) 그래서
우리 범부가 부처님 법을 그릇 해석하는 망집(妄執)이 됩니다.
망상(妄想)이 됩니다.
부처님 법은
아집이라 하는, 나라 하는 주관적인 집착과
또는 대상적인,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런 대상적인 존재에 집착하면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집착인 아집과
객관적인 집착인 법집을 떠나야
그래야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경전을 설하실 때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요,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있고 다른 대승경전을 설할 때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 천(天)자, 북 고(鼓)자,
하늘의 북이 자연명(自然鳴)이라,
하늘의 북이 저절로 울린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의 인식되는 범위만이 다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소박한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가령 천상도, 현실적인 것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천상도 긍정하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욕계(欲界)천상만 해도 욕계 6천이라,
색계(色界)천상 18천이라,
무색계(無色界)천상 4천이라,
욕계․색계․무색계 해서 28천의 하늘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정도의 업장(業障)을 지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지
인간이 최상의 그러한 복지(福祉)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우리 공부가 되어서 익어진다거나
또는 대승경전에 대해 신비로운 황홀경에 젖으면
그냥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의 북소리가 어디서 난데도 없이
항시 우리한테 울려온단 말입니다.
천우만다화! 하늘 천(天)자, 비 우(雨)자,
또 하늘에서는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하늘의 꽃이 그때그때 항시 비가 내리듯이
대승경전을 축복하고
우리 중생의 마음이 그만치 맑아지면
우리 업장이 녹아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런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
이런 꽃비가 우리를 감싸고 그러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도 법화경을 설할 때는,
대승무량경(大乘無量經)을 설하십니다.
대승 무량경을 설하실 때
부처님께서 상서로운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공부가 익어지면,
우리가 공부할 때 어느 때는
싫증도 나고 그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난데없이 청정미묘한 북소리가 울려오고
또는 찬란한 꽃비가 내리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봤을 때는
그때는 우리 피로라든가 싫증이
가신데 없이 몽땅 다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아르시지 않습니까.
극락(極樂)이라,
극락 그러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으로
인생고(人生苦)가 하도 많으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해서
사무칠 극(極)자, 즐거울 락(樂)자,
아주 행복한 극락세계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한테 이상(理想)을 제시하는 것이지
실제로 극락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통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극락세계를 말씀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우리는 항시 우리 중생의 지금 알고 있는 인식범위가
얼마만치 좁은 것인가 이걸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의 아버지라 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아데네의 레스폰 신전의 주랑에 가서
“먼저 그대 스스로를 알라”
그런 것이 기둥에 새겨져 있단 말입니다.
단순히 자기반성을 하고
함부로 경망한 짓을 하지 말라는
그런 경고적인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소크라테스 같은 진지한 분,
정말로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
내 자아(自我)가 무엇인가,
이렇게 자기를 천착(穿鑿)하고 파고들어 가는
그런 철학적인 인간으로 해서는
보통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그걸 파고들어가고
또 더욱더 깊이 천착하고,
그래서 드디어는 엑스터시(Ecstasy),
이른바 망아(忘我)아니에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깊은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서
다른 산란스런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삼매의 소박한 풀이 아닙니까.
헌데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자기탐구를 하던 끝에,
그때 기록을 좀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에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가지고서
한종일동안 한발도 옮기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명상에 잠겼다고 그래요.
사람들이 구경 와서,
더러는 하도 자리를 안 떠나니까
이불을 가지고와서 이불을 깔고서 거기서 자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느 때나 떠나는가 보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럴 정도로 지독한 집념이 강한 그런 걸로 해서
이른바 망아라, 황홀한 자기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엑스터시의 그런 경지에 몰입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기를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자신을 가지고 아테네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면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또 나중에는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고발을 당해서
옥중가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배(毒盃)를 마시면서
그야말로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자기 생을 마친 분이
이른바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 아닙니까.
우리는 종교철학에 있어서
아주 깊이 기억해 둘 또 위대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누군고 하면 서기 3세기 전에 나온 플로티노스(Plotinus),
이집트 태생인데 로마에 나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한 분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우리 종교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꼭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귀감 삼을 만한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부처님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도 남지만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말씀을 저는 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 철학은 주로 어떠한 것인가 하면,
여러 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그 일자(一者, nous(the one))라,
한 일(一)자, 놈 자(者)자, 일자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하나로 본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야 우리 불교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리 아니겠습니까.
플로티노스가 한말 가운데서 중요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영식(靈識)이,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일자라는 본래 근본자리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맑고 맑아지면 드디어는 그때는
하나로 딱 일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라는 근원적인 도리하고 신비적합일(神秘的合)一이라,
그것보고 신비적 합일이라 그래요.
직관적(直觀的) 하나가 된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플로티노스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사실은 플로티노스가 이른바 자기 스스로 모두를 다
독창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Platon), 플라톤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단 말입니다.
플로티노스 학파를 가리켜서 신플라톤주의 그래요.
신플라톤주의라.
그런데 사실은 서구 서양철학을,
저는 불교인이라
아직도 제가 철학서를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어디 가서 말하려고 하니까
그때그때 봐야겠지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는
대체로 신플라톤주의를 표방을 했어요.
가사 기독교인(基督敎人)도
위대한 신학자(神學者)가 많이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 4세기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그분도 위대한 교구(敎區)철학의 완성자인데
그분 철학에도 플라톤주의가 있습니다.
그분 철학에도 이른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거기에 상당한 분야를 차지한단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摩尼教, Manichaeism)로 부터서 기독교로
온전히 개종할 때는
신플라톤주의를 영향을 대단히 받았다고 돼있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애유기나, 이분도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그 뒤에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이분은 신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세기에 유명한 신비철학자인 에크하르트,
또는 15세기에 니콜라스 쿠다니스 이분은 추기경입니다.
니콜라스 쿠다니스도 굉장히 위대한 추기경입니다.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플라톤주의를 한마디로 하면 어떠한 것인가.
제가 주로 말씀하고자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가 의지하는
사상적 핵심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청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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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헤르만 헷세.